老師誕生後不久,在嬰兒時期就罹患了「致命的病」。 운영자| 24/3/2014 |次數 7,212

          老師的故鄉是<月明洞>,老師在那裡誕生。那時月明洞因為月亮很亮,所以被稱為「月亮谷」,也因為村莊太小而被稱為「山谷」。
      當時在我們的村子裡有「四棟房子」。上面的房子是朴牧師的家,下面的房子是老師的家,在那下面的房子是高牧師的,再下面的房子則是南執事的家。
      
      全村的人都有上教會。房子不過四棟而已,村莊非常小,但是在當時的四戶人家中,光是牧師就有六名,從那之後到現在,就誕生了十三名牧師。月明洞也可說是「聖職者的村莊」。
      
      老師的爺爺在王的底下輔佐王,從政到後來在日本占領期遭逢動亂。所以原本故鄉是在「公州」,卻避亂到「珍山墨山里」,之後來到了「月亮谷」,也就是「現在的月明洞」。
      爺爺在月明洞花了三塊錢買下茅草屋並開始定居,在那裡讓第二個兒子結婚,然後再讓第三個兒子,也就是我父親結婚。
      
      
      我父親和我母親結婚之後,住在老師的爺爺花了三塊錢買下的月明洞茅草屋裡,生下七個兒女,老師是第三個出生的。   
      母親的故鄉是「珍山校村里」。
      只有老四奎錫牧師是在韓國南北戰爭六二五的時候誕生的,所以故鄉不是「月明洞」,跟我母親一樣是「珍山校村里」。
      奎錫牧師與母親的「故鄉」一樣,「誕生的房子」也一樣。可能是因為如此,所以他現在還是跟母親生活在同一個房間裡,盡到侍奉母親的使命。
      
     
      老師誕生後不久,在嬰兒時期就罹患了「致命的病」而疼痛。即使餵老師吃各種藥也無法醫治。
      後來某天,老師從傍晚開始逐漸死去,結果還不到晚上就死了。於是母親拿棉被蓋住我之後,把我推到房間的炕尾 。
      
      母親說她打算一到深夜,就趁大家都睡覺時,把已死的孩子放入甕裡拿去埋葬,所以先去看了場地。那地方就在目前自然聖殿草坪通往展望台路上的山谷,是不太會被人發現的地方。
      對嬰兒來說,「瓦甕」就是「棺材」。因為是才出生一年的嬰兒,所以如果把他放入「小甕」,蓋上蓋子後埋在地裡,就會成為「墳墓」。
      
      到了深夜,家人一入睡,我母親就跟當時剛好來到出嫁女兒家裡的我外婆討論,然後打算去把孩子埋在地裡。
      埋葬前,雖然兒子已經死了,但母親最後想要再看心愛兒子的臉龐一眼,於是把完全蓋住臉的薄棉被掀開,並點燃煤油燈來看兒子的臉。那時,孩子睜開眼睛「眨了又眨」。
      母親心想:「會不會只有現在這時才睜開眼睛呢?」並且感動地注視著我,有種好像我在說「我不會死喔」的感覺。
      於是母親緊緊擁抱我,並且把我放在炕頭上,心想:「他會不會又死去呢?」所以母親直到隔天清晨都徹夜注視著我,那時她產生了「這孩子應該不會死,會活過來的」的想法。
      
      天一亮,外婆清晨一大早就起來問母親:「妳把孩子好好埋葬後回來了嗎?」母親回答說:「孩子又活過來了耶!」外婆說:「他的命很長耶!不過因為他死了之後又活過來,所以要好好觀察。」
      於是我母親就連煮飯時也一直看著孩子會變得怎麼樣,結果發現孩子在揮手,笑的時候眼神閃閃發亮。
      
      之後在短短三天內,孩子就死而復生,原本全身都很浮腫,後來就完全消腫而恢復正常。從那時起,孩子就健康地成長了。
      
      如同母親所經歷的,因為孩子死而復生,孩子的命很長,因此把孩子命名為「明錫 」。

     

         全能者 神、聖靈和聖子救活了我。


          2014年3月16日 主日話語中

     

     

     

     

     

     

     

        

    - Translation : 웨이룬

    내 고향은 월명동이고, 나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때 월명동은 달이 밝다고 해서 달밝골로 불렸습니다.

    마을이 너무 작아 골짜기로 불린 것입니다.

     

    그때 당시 우리 동네에는 네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윗집은 박 목사님 집이었고, 아랫집은 우리 집이었고,

    그 아랫집은 고 목사님이었고 그 아랫집은 남 집사님 집이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다녔습니다.

    집이 네 채밖에 없어서 마을이 매우 작았지만, 그 당시에 네 집에 목사만 여섯 명이 있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열세 명의 목사를 낳았습니다.

    월명동은 성직자 마을이기도 합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왕 밑에서 수종을 들며 정치를 하시다가 일제 강점기에 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공주가 고향인데

    진산 묵산리로 피했다가 달밝골’, 현재의 월명동으로 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월명동에 3원짜리 초가집을 사서 살기 시작하셨고,

    거기서 둘째 아들을 결혼시키고, 셋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결혼시켰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시어 선생의 할아버지가 3원을 주고 산

    월명동 초가집에서 살면서 7남매를 낳았고, 나는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고향은 진산 교촌리입니다.

     

    넷째인 규석 목사만 한국 남북 전쟁이 있었던 6.25 때 태어나서

    고향이 월명동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와 같은 진산 교촌리입니다.

    규석 목사는 어머니와 고향도 같고, ‘태어난 집도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머니와 한방에서 살면서 어머니 시중을 드는 사명을 가지고 삽니다.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갓난아기 때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서 아팠습니다.

    온갖 약을 다 먹여도 못 고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부터 죽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녁이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이불로 덮어서 방 윗목에 밀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밤이 깊어지면, 모두 잠을 잘 때 죽은 아기를 항아리에 넣어서

    갖다 묻으려고 장소를 봐 놨다고 합니다.

    그곳이 지금의 자연성전 잔디밭에서 전망대로 가는 골짜기였습니다.

    사람의 눈에 잘 안 띄는 곳이었습니다.

    아기에게는 질항아리입니다.

    태어난 지 1년 된 아기니까 작은 항아리에 넣어 뚜껑을 덮고 땅에 묻으면, ‘가 됩니다.

     

    밤중이 되어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들자

    우리 어머니는 마침 시집간 딸네 집에 와 있었던 친정어머니와 의논하고,

    아기를 땅에 묻으러 가려 했습니다.

    묻기 전에 마지막으로, 죽었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얼굴까지 푹 덮어 놓은 홑이불을 벗기고 호롱불을 밝혀 얼굴을 봤답니다.

    그때 아기가 눈을 뜨고 깜빡깜빡하고 있더랍니다.

    어머니는 지금 이때만 눈을 뜬 것인가?’ 하고 감격해서 쳐다보는데,

    나 안 죽어요.’ 하는 느낌이 오더랍니다.

     

    어머니는 꼭 끌어안고 아랫목에 놓고는 혹시 다시 죽지 않으려나?’ 하고,

    새벽까지 철야하며 지켜봤답니다.

    그때 아기가 안 죽고 살겠구나.’ 하는 마음이 오더랍니다.

    날이 새고 친정어머니가 아기 잘 묻고 왔냐?” 하는 말에 다시 살았어요!” 하니,

    명도 길다. 그러나 죽었다 살았으니, 잘 봐야 된다.” 하셨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밥을 하면서도 어떻게 되는지 계속 지켜봤는데,

    아기가 손을 흔들면서 똘망똘망하게 웃더랍니다.

     

    그 후 3일 만에 죽었다 살아나서 퉁퉁 부었던 온몸의 붓기가 쫙 빠져 정상이 되었고,

    그때부터 건강하게 컸답니다.

    어머니가 겪은 대로 아기가 죽었다 살아났으니 명이 길다고 하며

    아기의 이름을 명석이라고 지었답니다.

     

    전능자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께서 살리셨습니다.

     

     

     

     

    2014316일 주일말씀 중